[BOPO] 정혈, 당당한 피흘림을 위하여
LOVBOD  ·  03.12.2021

  우리는 홍길동과 볼드모트를 키운다


“나 그날이야” 혹은 “너 그거 있어?”로 통하는 우리들의 세계. XX 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난 이라면 한 번쯤은 상의 소매나 주머니에 생리대를 숨긴 채 어정쩡하게 화장실로 향한 적이, ‘그거’ 있냐는 친구에게 빛보다 빠른 속도로 생리대를 건넨 적이 있었을 것이다. 살아보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것은 홍길동뿐만이 아니었고, 함부로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볼드모트는 나와 자매들에게도 있었으니, 바로 생리다. 줄곧 생리는 금기의 단어로 여겨져 왔다. 흔히들 부르는 ‘그날, 마법, 대자연’ 등의 단어들은 생리를 차마 생리라고 부르지 못하는 데에서 온 은유적인 표현들이다.

놀라운 것은 한국뿐 아닌 전 세계 여성의 78%가 생리를 다른 말로 돌려 표현한다는 것이다. 미국 여성건강관리 앱 ‘클루(Clue)’와 국제여성건강연합(IWHC)이 실시한 1900개국의 총 90000건 설문조사 의 결과 전 세계적으로 생리를 돌려쓰는 표현은 총 5000여 가지 정도로 집계됐다. 대표적으로 독일에서는 '딸기 주간', 프랑스에서는 '영국군이 상륙했다', 이탈리아에서는 '토마토 수프가 너무 많이 익었더'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미국에서는 달마다 돌아오는 생리 주기를 이유로 아예 생리를 주기/기간의 뜻을 가진 'period'로 부른다.

임신과 출산을 오로지 '축복과 신비'로만(당연히 한 생명의 탄생은 축복이지만, 21세기에도 아이를 낳다가 혹은 임신 과정에서 죽는 산모들이 우리 생각보다 많이 존재하며, 임신 과정에서 오는 입덧과 우울증, 출산 과정에서의 관장과 회음부 절개 등 아이가 절대 뿅!하고 나오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마시라) 포장하는 사회에서 대체 왜 그 필수 전제 조건인 생리와 그 피흘림의 과정은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못한 채 쉬쉬 되어 왔던 걸까.



  "너 생리해?"
      "아니! 나 정혈해!"


흔히들 말하는 생리는 ‘생리 현상’에서 따온 말로, 배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생리에 더럽고 불순한, 비위생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실제로 2016년 6월, 광주 광산구의회 정례회의에 참석한 한 남성 국회의원이 ‘생리대’라는 단어가 듣기 거북하니 '위생대'로 부르라고 요구하며 논란이 되었다. 심지어 해당 회의가 생리대 대신 깔창을 사용한 청소년의 사연으로 저소득층을 위한 생리대 지원을 논의하고자 만들어진 자리였기에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이에 생리라는 단어 대신 배설물과 혈을 동급 취급하지 않고, 한 달 주기로 일어나는 현상을 일컫는 ‘월경(月經)’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늘었다. 그러나 생리와 월경 모두 자궁내막의 탈락으로 인한 출혈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때문에 최근에는 이러한 표현들 대신 직관적으로 ‘깨끗한 피’를 뜻하는 ‘정혈(精血)’로 이를 대체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한다.

물론 누군가는 ‘굳이’ 이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지구의 구성원 반 정도가 인생의 절반 동안 겪는 일이 누군가에게 거북한 단어로 치부되는 일은 없어야하지 않을까. 언어학자이자 문학평론가였던 故 황현산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언어로 표현된 생각은,
그 생각이 어떤 것이건, 그 언어의 질을 바꾸고,
마침내는 그 언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세상을 바꾼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아직까지, 그리고 여전히 정혈이라는 단어보다 생리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굳의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단어다. 인생의 반 이상을 사용한 단어를 하루아침에 새로운 것으로 바꾸는 일이 여간 쉽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의식적으로 바꾸어 말하려는 노력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지난달 어느 아침에는, 익숙하지만 또 전혀 익숙해질 수 없는 새빨간 불청객을 맞이하고는 "아!!! 나 생, 아니 정혈해!!!"라고 했다. 평소 같았으면 생리한다는 말로 문장을 끝맺었겠지만 이렇게 차츰 의식하다 보면 언젠가 아직은 조금 낯선 정혈이라는 단어와 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모여 정혈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된다면, 우리의 피흘림을 불결하다 생각하는 이들이 적어지지 않을까.

황현산 선생님의 말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우리의 의식을, 더 나아가 사회의 결을 결정한다. 더 이상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부끄러워하며 숨기지 않기를 바란다. 생리, 월경이라는 단어 대신 ‘정혈’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자. '깨끗한 피'라는 뜻의 정혈을 말이다.







출처 및 참고문헌


Many women still can’t talk openly about their periods – this app is trying to change that/Colby Itkowitz / The Washington Post / 2016.3.1
Top euphemisms for “period” by language / Katrin Freidman / Clue / 2016.03.11
공짜 생리대 도시 된 뉴욕 "생리는 불결하고 부끄러운 것 아냐" / 박길자 / 여성신문 / 2016.07.20
“나 생리해”.. 쉽게 말할 수 있어? / 김정은 / 스냅타임 / 2019.1.15
"여자라서 수천만원 지불"... 생리대, 공공재 안됩니까? / 이채은 / 머니투데이 / 2018.04.09
“생리대란 말 쓰지마” 새누리 의원의 이상한 요구 / 황소연 / 오마이뉴스 / 16.06.28
“생리를 생리라 불렀는데 그게 쿨하다고요?” / 박가영 / 머니투데이 / 2019.04.28
[카드뉴스] '생리'를 '생리'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 박성은 / 연합뉴스 / 2017.08.06
황현산, 『사소한 부탁』, 난다,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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