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PO] 털털한 여자들이 온다
LOVBOD  ·  04.14.2021

  더위, 습도, 매미 울음소리, 장마, 고장 난 에어컨, 탈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감기
여름이었다.

더위, 습도, 매미 울음소리, 장마, 고장 난 에어컨, 탈탈탈 돌아가는 선풍기, 감기. 앞서 나열한 단어들의 공통점은 고작 '여름이었다' 이 다섯 글자로 너무 쉽게 미화된다는 것. 영혼까지 녹일 것 같은 더위와 숨통을 조이는 습도 때문에 여름을 싫어하지만서도 오직 여름에만 만끽할 수 있는 파릇함과 청량함, 물놀이, 혹은 보송하게 듣는 빗소리 같은 것들 때문일까, 이상하게 지나고 나면 여름은 늘 그리운 계절이 되어있다.

뽁뽁이에 쌓인 취급주의품 마냥 롱패딩 군단 틈에 껴서 옮겨지던 날들이 생생한데 이제 한낮이면 반팔을 입은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두꺼운 옷들이 얇아지고, 길었던 옷들이 짧아지니 기다렸다는 듯 제모 용품들이 각종 알고리즘 사이로 침투하고 있다. 뭐든 미화시켜버리는 그 계절, 바야흐로 새 여름이 코앞이라는 뜻이다.



  "나는 왜 털부자일까?"

지난주, 친구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자신이 털세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강력한 1위 후보임을 어필하는 말과 함께 증거자료로 자신의 팔 사진을 보내왔다. 제모용품을 추천해달란다. 나는 '우리 ○○이 올겨울은 문제없겠네'라고 답장하며 적당한 놀림으로 대수롭지 않게 그의 털을 넘기려고 했는데 친구에게는 어지간한 스트레스였던 것 같다. 친구가 보낸 사진을 보고 소매를 걷어 내 팔을 봤다. '음, 돌아오는 겨울은 나도 문제없이 따끈하게 보낼 수 있겠군.'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 오고 있다는 거다.

우리의 무성한 팔뚝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뉴욕 한복판 지하철역에서 마주했던 광고가 생각났다. 여성 제모 용품을 파는 미국 기업 'billie'의 광고였다. 친구들과 하하호호 떠들며 역사를 빠져나가던 중 광고를 맞닥뜨리고는 말없이 광고를 바라봤다.


솜털도 없는 완전무결한 여성이 나와 있지도 않은 털 때문에 온몸을 '미는 척' 하던, 너무 익숙해져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광고들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에게만큼은 꽤나 익숙한, 그러나 누구 하나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못했던) 일상의 장면들이 꽤나 커다랗게 뉴욕 곳곳에 걸려있다는 것이, 우두커니 서서 광고를 보던 우리와는 달리 현지인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쓱 지나쳐가는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털 난 사람들이 여성의 털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아이러니에 관하여

언제부터였을까. 여성의 털은 늘 놀림의 대상, 숨겨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 많고 많은 부위의 털 중 제일은 아마 '겨드랑이 털'이다. 털 of 털인 '겨드랑이 털'을 논하자면 영화 '러브픽션'(2012년 개봉)을 빼놓을 수 없겠다.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잠자리 직전 희진(공효진 역)의 겨드랑이 털을 본 주월(하정우 역)이 희진의 털에 말을 걸며 온갖 '털 예찬'을 늘어놓던 클립을 안 본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극 중 주월은 희진의 겨드랑이 털을 보고 그에게 갖고 있던 환상을 와장창 잃는다. 능구렁이 같은 영화 속 주월과 털마저도 사랑스럽게 소화하는 희진 때문에 숨이 멎을 듯 웃다가도 문득 나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아니, 정작 자기 겨드랑이는 수북하면서 대체 왜? 숱이라도 치던가!'하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비단 주인공 주월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 영화 속에서 겨털은
하나의 해프닝적인 에피소드이고,
보여지는 것도 단 한 신이었는데...
(...)
그런데 사실 겨드랑이 털 가지고
여자 자체를 판단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나요?"

배우 공효진 인터뷰 중


제모를 안 하면 안 해서 털이 있다고 난리, 잦은 제모로 피부가 조금 검게 착색되면 검다고 난리, 제모 후 다시 자란 짧은 털들은 '샤프심'이라며 난리. 온갖 레이저 제모 할인 광고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 밀든 뽑든 지지든 뭔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롱을 받는다니. 어떤 이들은 남들이 다 있는 곳(이를테면 머리)에 '털이 없어 놀림을' 받고, 또 어떤 이들은 남들처럼 털이 있음에도 남들이 없기를 바라는 곳에 '털이 있어 놀림을' 받는 아이러니. 21세기에 털의 유무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다.

모든 제모의 전제는 '털이 존재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놀랍게도 여성들에게도 모근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여성이라고 날 때부터 온몸이 매끈하게 태어나는 건(사람에 따라, 부위에 따라 모량과 털의 유무에 차이는 차치하고) 아니니까. 정작 그런 말들을 하는 이들의 대다수는 태어나 한 번도 제모를 생각해본 적 없는 이들인 것이 이해가 안 되기는 하지만.

"모르셨겠지만,
놀랍게도 여자들도 털이 납니다.
인중에도, 팔에도, 다리에도,
겨드랑이에도.
가슴에 나는 사람들도,
배렛나루에 나는 사람들도 있어요."





  My 털, my choice!

벌써 4월도 중반을 향해 흘러간다. 꽃구경 한 번 제대로 못 했는데 애석하게도 2021년의 봄이 간다니.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 잎들을 보고 있자니 머지않은 여름이 반가우면서도 괜히 심술이 난다. 내가 심술쟁이가 되든 말든 오늘 오전에 받은 '여름 맞이 레이저 제모 이벤트' 문자를 보아하니 ‘…여름이었다.’의 계절이 오기는 하는가 보다.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대체 어떻게 알고 문자를 보내는지는 모르겠으나 여름이면 옷이 짧아지니까, 또 겨울이면 미리미리 준비가 필요하니까 등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어쩌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사실상 매 계절마다 털들과의 전쟁을 부추김 당해온 건 아닐까.

다가오는 여름, 누군가 당신의 겨드랑이(비단 겨드랑이뿐만은 아니지만)에 무례한 말들을 쏟는다면, 아주 당당하게 "면도기/면도크림 하나 사준 적이 있는지, 레이저 제모에 할애되는 소중한 시간과 체력, 그리고 비용에 지분이 있는지" 묻는 건 어떨까.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저마다 구축해온 우주가 있다. 또 세상에는 뽑고, 뜯고, 밀고, 지지는 등 다양한 제모의 방법도 존재한다. 이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냥 둠'이라는 선택지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에 대한 결정권과 소유권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가 타인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선택에 구태여 물음표를 붙이지 않는다면 그만큼 우리도 우리의 행동에 자유를 얻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당장 나는 올여름, 팔을 소복이 덮은 털을 그냥 둬보기로 했다.








출처 및 참고자료

'러브픽션' 공효진, "아니 왜 겨털로 공방이 일어나죠?" / 배선영 / 마이데일리 / 2012.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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